여수 10 味
돌산갓김치
장어구이 및 장어탕
새조개 샤브샤브
갈치조림
게장백반
전어회 및 전어구이
서대회무침
한정식
굴구이
갯장어 샤브샤브
서대회무침
여수10 景
오동도 여수시 수정동에 위치한 오동도는 여수의 상징인 섬이다. 한려 해상 국립 공원의 시작점이기도 한 오동도는 1933년 일본 강점기때 신항 개발을 위해 길이 768m의 긴 방파제로 육지와 연결되어 섬 아닌 섬이 되었고, 60년대 후반부터 국립공원으로 지정이 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섬 일대에 유달리 오동나무가 많아 오동도라 불리웠다고 하나, 지금은 오동도 이름을 가져다 준 오동 나무의 흔적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오동도에는 목본류 194종과 초본류 224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데, 상록 난대성 수종인 동백이 군락지를 이뤄 약 3,000여 그루가 서식하고 있고, 시누대, 후박나무, 해송, 그리고 우리나라에 1과 1속 1종이 자라는 희귀한 돈나무가 자생을 하고 있다. 특히 오동도에 서식하는 동백은 다른지역에서 봄에 피는 춘백과는 다르게 이르면 11월경부터 피기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 온 섬을 붉게 물들이는 동백(冬栢)으로 개화 절정기에는 마치 섬 자체가 하나의 동백꽃으로 보이기도 한다. 오동도에 오동나무가 사라진 까닭은 고려 공민왕때 요승 신돈이 봉황이 오동나무 열매를 먹기 위해 오동도에 드나들고 이것은 왕조에 불길한 징조라 주장하여, 오동도의 오동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지고 있다. 이외에도 오동도는 시누대(신이대) 및 동백나무, 억새풀에 얽힌 토끼와 거북의 이야기, 오동도의 남쪽 동굴에 살았다는 지네의 용굴등 많은 전설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섬이다. 일본 강점기때에 오동도는 학교조합재산으로 관리 되어, 해방후 교육청에서 인수하여 관리를 하였고, 1967년 여수시가 사들여 시민들의 휴식처 및 낚시터로 이용을 하다가, 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이 되면서 등대와 항만표지 기지창을 제외한 39동의 민간 건물은 모두 철거 되었다. 그후 1984년 오동도 종합 상가가 준공 되었으나, 2003년 태풍 매미로 폐허가 되다시피 하여, 오동도 종합 상가 건물을 전면 리모델링 하여, 지상 3층에 패스트푸드, 편의점, 게임랜드, 전시관, 회센터, 한식당 등이 들어선 오동도 카멜리아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관되었다. 이외에 오동도에는 높이가 25미터의 등대가 있어, 이곳을 테마공원으로 조성하여 놓았고, 음악 분수공원, 맨발 공원 등과 오동도 입구 방파제와 동방파제, 산책로, 암절벽 부분에 야간 조명 시설을 하였고, 2.5km에 이르는 자연 숲터널식 산책로 조성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길이 768m, 폭 1∼3m의 오동도 방파제에 여수미술협회 소속 현역작가들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한 방파제 벽화를 설치하여, 관람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영취산 진달래
해상케이블카
향일암
여수엑스포해양공원
거문도와 백도
금오도 비렁길
여수산단 및 여수 야경
진남관
종 목 |
국보 제304호 |
명 칭 |
여수진남관(麗水鎭南館) |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
수량/면적 |
1동 |
지 정 일 |
2001.04.17 |
소 재 지 |
전남 여수시 군자동 471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
여수 진남관은 1598년(선조 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移柱)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 어칸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여진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봉 등의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초공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측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등 18세기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
이순신대교 |